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데사 백국 (문단 편집) === [[세호야 또 속냐!!|조슬랭아! 또 잡히냐!]] === 조슬랭은 이제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되었다. 그의 직함은 [[갈릴레아]]의 대공이자 투르베셀의 군주, 에데사의 백작 등 다양했다. 그의 재력 덕분에 백국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122년에 또 무슬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 그를 사로잡는 영광을 얻은 장군은 발락 가지라는 영주였다. 그는 한창 상승세를 탄 투르크 영주였는데 1120년에는 경쟁 상대인 투르크 부족들과 연합한 [[동로마 제국]]의 둑스,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르투크 왕조]]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조슬랭을 구하러 온 [[보두앵 2세]]마저 사로잡았다. 조슬랭 휘하의 아르메니아 군인들은 그를 되찾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죽음을 불사한 아르메니아 특공대 50명은 상인으로 위장해 그들이 갇힌 요새로 잠입한 뒤, 투르크 병사들을 밤에 몰래 살해하고 요새를 차지하였다. 보두앵과 조슬랭은 자유를 찾았으나, 발락 가지는 탈옥 사실을 알아채고 곧바로 요새를 포위했다. 조슬랭은 보두앵을 구하러 오겠다고 다짐하고 혼자서 도망쳤다. 다행이도 왕이 없는 1년간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단은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협정으로 지원을 약속받고 이집트의 공세를 몰아냈으며, 보두앵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프랑스의 선량공 샤를과 외스타슈를 왕으로 삼으려 한 시도도 있었지만, 둘 다 왕위를 거절하면서 해결되었다. 조슬랭 본인은 보두앵의 아내 모르피아와 함께 보두앵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발락은 이미 1124년에 반란으로 죽었고, 일가지의 아들 티무르타쉬가 보두앵을 데리고 있었다. 조슬랭은 안티오키아의 아자즈, 아니텝등의 성곽을 내 주고 8만 디나르를 줄 테니 보두앵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티무르타쉬는 보두앵의 어린 딸을 조약이 성사될때까지 데리고 있겠다는 조건으로 보두앵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보두앵은 풀려나자 마자 에데사 백작 조슬랭과 안티오키아 지원군을 이끌고 자신의 딸이 잡혀있는 알레포 성채를 두들겼다. 보두앵의 딸은 풀려났고, 조슬랭도 그 기세를 몰아 1125년에는 아자즈 주변의 많은 땅을 얻었다. 모술에서 쳐들어오는 무슬림군도 1126년에 보두앵 왕과의 연합으로 박살낼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